2025년 4월
SPECIAL
PEOPLE
READING
GLOBAL
KOFIC STORY
BOX OFFICE
가성비와 코스프레를 넘어서야
대만 청춘로맨스 리메이크를 보며 생각한 것들
진행 _ 김혜선(웹매거진 한국영화 편집장)
사진 _ 이승재(한국경제매거진 기자)
대담 _ 민용준(영화 저널리스트), 이은선(영화 저널리스트)
2025-03-04
대만 청춘로맨스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2007) <청설>(2009)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2011)가 각각 동명의 한국영화로 리메이크되었다. 가장 최신작인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이하 <그 시절>, 2월 21일 개봉)를 비롯해서 극장 상영 중인 <말할 수 없는 비밀>(1월 27일 개봉)과 지난해 하반기 개봉작 <청설>(2024, 11월 6일 개봉)까지 모두 세 편이다. 대학 졸업 이후 진로를 고민하던 용준(홍경)이 도시락 배달을 갔다가 만난 여름(노윤서)에게 첫눈에 반해서 벌어지는 이야기 <청설>, 유학 중에 돌아온 피아니스트 유준(도경수)이 신비로운 피아노 선율에 끌려 들어간 학교 실습실에서 운명처럼 정아(원진아)와 만나는 판타지 음악 로맨스<말할 수 없는 비밀>, 모범생 선아(다현)와 장난스런 진우(진영), 그리고 친구들이 보낸 한 시절에 관한 이야기 <그 시절>은 모두 사랑과 소통, 유대감을 청춘의 이름으로 묶는다. 이제는 하나의 장르라고 해도 좋을 ‘대만 청춘로맨스’의 한국 리메이크. 15년에서 20년 정도의 시간차를 두고 리메이크된 세 편의 영화는 현재 한국영화 산업에서 큰 비중은 아니더라도 그 역할과 기능에 대해 돌아볼 만한 의미가 있다. 민용준, 이은선 두 영화 저널리스트가 이 리메이크의 허와 실을 들여다보았다.
영화 저널리스트 민용준, 이은선
Q비교적 길지 않은 간격으로 대만 청춘로맨스들을 리메이크한 한국영화들이 개봉했다. 대만 청춘로맨스영화들이 한국에서 리메이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전략을 어떻게 바라보나?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시대의 키워드 ‘가성비’와 부합한다는 인상이다. 검증된 IP를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과거의 인기 웹툰이나 소설의 영화화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고. 한국영화에 대한 투자 심리가 위축되면서 일어난 경향성이기도 할 것이다. 대부분 로맨스라는 점도 중요하다. 보편적인 소구가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대만과 한국, 두 국가 간의 정서가 비슷하다는 것도. 특히 대만영화의 입시 시스템이라든지 가족이 중심에 놓이는 정서들이 한국 관객에게는 넘기 어려운 허들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중저예산으로 가능한 멜로물에 대해 소극적인 실험이 이루어지는 시기 같다. 로맨스나 멜로영화가 한국영화의 한 축을 차지하던 때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 흥행 시장에서 자취를 감춘 분위기이고 제작도 소극적이었다. 지금의 리메이크는 관객이 이 장르에 어느 정도 소구력을 가지고 있는지 시험하는 ‘베타 테스트’ 같다고 할까. 티켓 파워가 검증되었다고 말하기 어려운 청춘 스타들을 주연 배우로 기용해볼 수 있는 좋은 포맷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게 가성비를 생각하게 한다. 영화계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다. 가요계에서도 요즘 2000년대 초반 1세대 아이돌 노래의 리메이크가 엄청나다. SM엔터테인먼트 30주년 같은 특별한 이슈도 있지만 과거의 것을 발굴해서 새롭게 선보이는 포맷들이 요즘 문화계 전반에 유행하고 있다. 이런 전략이 좋다 나쁘다 말하기 이전에 지금처럼 투자나 제작이 위축된 상황에서 충분히 시도할 수 있는 포맷이다. 필살 전략 같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의 대만 원작 포스터
<말할 수 없는 비밀>의 한국 버전 포스터
가성비라는 말에 동의한다. 리메이크된 세 편을 보면 대체로 손익분기점이 100만 명 정도를 왔다 갔다 한다. 기본적으로 시장에서의 흥행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규모의 장르로서, 대만 청춘로맨스의 리메이크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 사실 이런 청춘영화들이 한동안 한국에 없었다. 학원물들이 나와도 주로 호러물이었고. 이 로맨스영화들이 한 축으로 들어오는 경향이 생겼다. 대만영화가 한국영화 시장에 없는 부분을 확실히 갖고 있다. 이것이 K-팝 문화와도 연결된다. 세 편의 리메이크작에서 주요 배우들 가운데 한 명씩은 다 K-팝 아이돌을 캐스팅한 상황이다. 한국 뮤지컬 시장과도 비슷하다.
민용준 영화 저널리스트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우리 둘 모두 K-팝을 생각했다는 것은 중요한 포인트 같다. 그것이 세 편의 대만영화 리메이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다. 현역 아이돌 혹은 아이돌 출신의 배우를 기용했다는 것. 이것은 요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오리지널 시리즈를 만들 때 해외 판매가 되는 배우를 캐스팅한다는 기조와 같다. 지금 상황에서 한국영화가 오리지널 시리즈처럼 비용을 쏟아부을 수는 없고, 그렇다면 가장 쉽게 접근하고 내세울 수 있는 게 아이돌이다. 팬을 모을 수 있는 응집력 혹은 티켓 파워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어느 정도 윈윈으로 보인다.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해외 판매 혹은 팬을 모을 수 있다. 배우로서는 연기에 대한 시험대를 아주 가볍게 한번 넘어본다. 그런 의미에서 청춘영화에 대한 각자의 소구가 만난 결과다.
Q각각의 작품을 보면서 동시에 원작을 떠올리게 된다. 각 작품과 원작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원작의 감성을 잘 살리면서도 우리만의 색을 입혔을까?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세 작품 모두 사소한 캐릭터 설정은 바꿨지만, 이야기의 큰 줄기나 반전을 바꾸지 않았다는 점에서 ‘거의 그대로의 리메이크’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니 세 편 각각의 연출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들을 다소 유보하게 된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의 경우 원작의 주인공들은 고등학생이지만 한국판은 어쩔 수 없이 대학생으로 바꾼 변화가 있다. 자연스러운 캠퍼스 연출을 위해서도 그랬을 것이다. 한국에서 원작 속 대만의 학교처럼 그렇게까지 예쁜 학교는 찾기 힘들 테니.(웃음)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주인공들의 연령 설정마저도 안 바꿨을 가능성이 크다. 영화 후반의 반전도 원작에서 이미 놀라운 힘을 보여준 장치였기 때문에 리메이크에서 그 반전을 제외하기는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즉, 어떻게 각색을 해도 어려운 시나리오였다.
<청설>은 조금 독특한 감각을 느꼈다. 주인공들이 수어를 쓰는 것에서 비롯된 감각이라고 할까. 원작 개봉 후 시간이 흐르면서 자막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지 않나. 한국 리메이크는 언어의 가치라든지 본질에 대해서 더 생각하게 했다. 수어는 시선이 엇갈리면 소통이 완전히 불가능한 언어라는 사실, 그 때문에 서로에게 눈을 뗄 수 없다는 것 같은. 진정한 대화의 가치, 소통의 방식을 얘기하는 요즘 시대에 딱 맞춰서 찾아온 언어 같았다. 물론 한국판 <청설>이 발견한 장치는 아닌데, 원작의 정서가 시대에 꼭 맞게 다시 찾아온 느낌이어서 영화 전체가 새롭게 보였다.
<청설>의 대만 원작 포스터
<청설>의 한국 버전 포스터
개봉한 세 편에서 한국화한다는 것은 한국적인 풍경을 바꾸거나 원작의 가족 구조를 반영하는 정도의 수준이다. 애초에 원작의 특성 중 하나가 ‘도시 영화’라는 점이었다. 타이난에서 찍었는지 타이페이에서 찍었는지에 따라서 풍광이 굉장히 달랐다. 한국 리메이크 영화들은 그런 로컬라이징의 특색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세 리메이크 모두 풍광이 유사해 보인다.
조금 과격하게 말하면 한국판은 ‘원작의 코스프레’ 같다. <그 시절>의 경우, 이 리메이크판에서 가장 궁금했던 게 후반부의 키스신이었다. 과연 주인공 진우 역의 진영이 원작의 커징텅(가진동)처럼 그 연기를 할 것인가. 커징텅은 이유를 알 순 없지만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집에서 옷을 거의 벗고 다닌다. 그 장면이 자주 나오고, 주인공 집안의 어떤 문화로 독특한 캐릭터 빌드업 기능을 한다. 리메이크할 때 과연 반영할까 궁금했는데, 몇 장면에서 진우의 아버지가 그런 모습으로 나올 뿐이다. 표현하기 쉽지 않겠구나 생각한 원작의 요소들이 확실히 변형된 것을 보면서, 오히려 대만영화의 과감함을 느꼈다. 한국 리메이크 영화들은 원작의 중력을 벗어날 수는 없고, 과감한 전략을 취할 정도의 예산을 들인 영화들도 아니기 때문에, 딱 그 정도 수준 안에 머무는 것 같다.
민용준 영화 저널리스트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차라리 빼는 게 좋지 않았을까 싶은 장면들도 있다. 예를 들어 피아니스트 유준(도경수)이 폴란드에서 유학 중이었다는 설정을 지닌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첫 장면이다. 누가 그곳을 폴란드라고 믿겠는가?(웃음) 과감하게 예산을 투입하든가, 아니라면 곁가지들을 걷어내고 어떻게든 현지화에 집중했어야 한다. 우리만의 색을 입혔는가라는 질문에 딱히 답을 내릴 수가 없는 게, 세 편의 공통적인 특징 같다.
촬영과 편집 등 기술적인 만듦새 측면에서는 한국 리메이크가 원작보다 훨씬 깔끔한 느낌이다. 그런데 기억에 남는 장면은 오히려 대만 원작에 있었다. 로맨스가 지닌 순정의 순도도 원작이 더 높다. 한국판 리메이크 세 편의 기본적인 정서가 다 비슷하다. 원작 세 편은 각각의 관계 안에서 나오는 정서의 개별성이 있었다. 한국판은 인물과 인물의 관계, 사랑이라는 감정이 보편적인 테두리 안에서 크게 설명이 필요 없는 정도의 느낌에 머물러 있다. <그 시절>의 경우가 특히. 원작에는 독특한 캐릭터가 많다. 커징텅의 친구들이 그렇다. 한국판에서는 ‘변태완’ 캐릭터로 가져왔는데, 조금 더 설정을 추가하거나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돌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또 하나, 한국판에서는 시대성이 안 보인다. 원작에서는 1999년도에 대만에서 일어났던 대형 지진 사건을 다뤘다. 현지 관객들은 그 부분에 몰입했을 것이다. 마치 <벌새>에 성수대교가 나왔던 것처럼. 한국판에는 그런 기능이 약하다. 리메이크 단계에서 원작의 가치가 훼손된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민용준 영화 저널리스트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대만 원작 포스터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한국 버전 포스터
Q애초에 한국영화의 감성과 대만영화의 감성이 지닌 차이가 있을까? 예전부터 대만 청춘로맨스영화들을 볼 때면 뭔가 더 ‘청량하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완전 있었다.(웃음) 이 부분은 학창시절 청춘을 다루는 한국영화의 기본적인 문법과 관련 있다. 한국영화는 기본적으로 그 시절을 트라우마로 접근한다. 이것은 2010년대 이후 <파수꾼>이 만들어낸 거대한 그늘 같은 것이다. 특히 남성들의 집단적 향수를 일으키는 것 혹은 트라우마를 그 시절의 체제로 삼고 있다. 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 <약한 영웅 Class 1>(2022)이 성공한 것도 같은 이유다. 군대 이야기, 또래집단 사이에 규율을 정해서 질서가 잡히는 이야기가 한국의 학창시절을 다룬 영화들의 기본 문법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첨가되는 게 왕따 문제, 아니면 <한공주>(2014)처럼 사회적 이슈나 소외계층의 이야기다. 아니면 젠더 이슈로 간다거나. 가끔 <족구왕>(2014) 같은 별종이 튀어나왔지만. 낭만을 담보하기 어려운 한국 사회의 특성 때문인 것 같다.
또 하나. 대만 청춘로맨스 리메이크 세 작품도 그렇고, 드라마든 뭐든 좋은 반응을 얻었던 청춘물을 떠올리면 주인공들이 다 예체능을 하고 있다. 입시를 기본으로 하는 교실에서는 아무 로맨스도 만들어지지 않는 게 한국의 현실인 거다. 거기서 왕따를 당하거나 학교 폭력을 겪거나 가난으로 고생하거나.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처럼 펜싱을 하거나, <선재 업고 튀어>처럼 수영을 하거나 아무튼 입시 공부가 아닌 무언가를 해야 로맨스가 발생한다. 한국의 학창시절을 배경으로 청량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기는 정말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대만영화에서 느껴지는 산뜻함이 분명히 있다. 일본영화 리메이크와의 차이도 느낀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면들이 일본영화 특유의 개성으로 있을 때 호오가 생긴다. 대만영화는 캐릭터가 조금 괴상하고 뾰족해도 오히려 편안하게 더 넓은 층의 공략이 가능한 영화들을 만든다.
대만인은 중국인과 유사하지만 텐션이 더 낮다고 한다. 일본인은 기본적인 텐션이 매우 낮지 않나. 대만인은 상대적으로 그보다 높고. 그러니까 중국과 일본 사이의 어딘가에 대만이 있는데, 묘하게 한국과 코드가 겹친다는 느낌? 최근 대만 현지에서 과거사에 대해서 젊은 세대들이 각성하는 문화가 있고, 기성세대는 오히려 일본 친화적인 분위기도 동시대 한국과 비슷한 느낌이다. 정서적으로도 비슷한 기류가 있다. 대만 원작을 보면 수업시간에 “차렷! 경례!”부터 시작한다. 서양영화에서 볼 수 없는 코드다. 아시아권의 나라들이 다 그렇지도 않다. 묘한 친밀감이 생긴다.
동시에 대만영화와 한국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앞서도 얘기했지만 ‘날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 시절>의 원작은 틴에이저 영화이면서 성적인 유머들을 많이 담아내고 있는데, 그게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다. 주변에서 받아들이는 리액션의 태도가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리메이크되면서 제작 단계에서 그런 요소들이 많이 깎였다. 한국은 개방적이냐 보수적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다. 성적 유머를 표현했을 때 영화의 위험요소가 된다고 생각하면, 감독이나 작가가 굉장한 사명감을 갖지 않는 이상 다 잘라내서 가장 평범한 표현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로 간다. 여기에서 ‘원작의 코스프레’ 같은 태도가 생기는 게 아닐까?
민용준 영화 저널리스트
영화 저널리스트 민용준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맞다. 한국에서는 섹슈얼한 코드는 절대로 고등학생들의 얘기로는 만들 수 없다는 어떤 불문율이 있나 싶을 정도다. 사실 청춘의 시절에 청량함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의 어두움이 꼭 학교 폭력으로만 발현될 이유도 없지 않나. <아메리칸 파이>처럼 2차 성징을 겪는 문제에 봉착한 이야기로 풀릴 수도 있고, 그게 브라이언 드팔마의 <캐리>(1976)처럼 어떤 장르성을 띨 수도 있는데. 한국영화에서는 섹시한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면 적어도 대학생쯤 되어야 한다. 교복 입는 세대의 이야기를 만들 때는 한층 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최근 한국영화에서 교복을 입는 세대가 단체로 등장하는, 기억할 만한 작품을 떠올려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드라마만 떠오른다. 그런데 그게 다 입시와 관련 있다. <스카이 캐슬>(2018, JTBC) <하이라키>(2024, 넷플릭스) <피라미드 게임>(2024, TVING) <선의의 경쟁>(2025, U+TV) 등. 입시를 둘러싼 호러물에 가까운 이야기들이지 않나. 한국은 확실히 장르화가 편중이 되어 있다.
대만영화는 한국에서 개봉하면 의외로 대부분 평타를 친다. <나의 소녀시대> 같은 경우도 국내 개봉 당시 누적 관객 수 40만을 넘겼다. 관객수 30만~40만 대인 대만영화는 여러 편인데, 일본영화는 생각보다 그렇지 않다. 정서적으로 몰입하게 하는 ‘정서의 대중성’이 약한 것 같다. 앞서 말했듯 일본영화의 낮은 텐션을 “심심하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 심심함을 좋아하는 코어 팬들이 밀도나 깊이는 있겠지만, 시장성이 있다고 말하기에는 애매한 규모랄까. 지난 10년 사이 대만영화가 일본영화보다 좀 더 확실한 시장성을 보여 왔다. 허광한, 왕대륙처럼 스타 팬덤을 확보하고 내한하는 경우가 대만영화에서 더 많이 발생하고 있다. 심지어 허광한은 디즈니플러스의 한국 시리즈 <노웨이 아웃: 더 룰렛>에 출연했고, 최근 <나의 소녀시대>의 여주인공이었던 송운화도 한국과 대만 합작영화 <아무도 모르는 집>의 여주인공으로 출연했다.
민용준 영화 저널리스트
Q세 작품 모두 신인급 감독들이 연출을 맡았다. <청설>의 조선호 감독,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서유민 감독은 이 작품들이 각각 두 번째 영화다. <그 시절>의 조영명 감독은 단편 연출작만 있는 신인이다. 이들에게서 어떤 경향이 엿보이나?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대만 청춘로맨스의 리메이크가 상대적으로 신인급 감독들에게 기회의 장이 되어주고 있다. 분명한 시장이 하나 뚫렸다는 생각이 든다. 데뷔작이 저평가를 받았거나 흥행 면에서 유의미한 스코어를 거두지 못했을 때, 이미 검증이 끝난 기획을 맡기면서 리스크를 줄이는 게 최근의 트렌드 같다. 세 감독 모두 독자적인 연출 역량이나 개성을 빼어나게 잘 구현했다기보다 안전한 작품을 만들었고, 원작의 감성을 잘 이해하고 연출했다는 생각은 한다. 조금 흥미로운 부분은, 조선호 감독은 <하루>를 연출하고 <더 웹툰: 예고 살인>을 각색하는 식으로 다른 장르에 가닿았던 감독이고, 서유민 감독은 허진호 감독의 연출부에 오래 있었지만
<내일의 기억>이라는 스릴러로 연출 데뷔를 했다. 사실상 그들의 연출적 지향점은 지금 내놓은 영화들에 조금 더 가까울 수 있는데, 시장의 상황과 감독들 개개인의 고충과 많은 것들이 맞아떨어진 결과인 것 같다.
영화 저널리스트 이은선
과거에는 저예산 호러물로 연출 데뷔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첫 영화를 찍고 성공했을 때 두 번째 영화에서 자기가 하고 싶던 영화를 찍는 패턴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조선호, 서유민 두 감독은 공통적으로 첫 영화가 스코어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두 번째 영화가 원점으로, 고용 감독 시스템으로 다시 돌아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게 희한하게 또 대만 청춘영화 리메이크다. 10대 혹은 20대 젊은 청춘로맨스물이 지금 고용 감독이 필요한 시장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산업 내에서 저예산 호러나 스릴러가 예전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고, 이것은 OTT의 흐름과 맞물린다. 장르물들이 지금 다 OTT에 몰려 있으니까. 대만 청춘로맨스의 한국 리메이크가 어떻게 보면 한국 영화 시장을 보여주는 바로미터 같다.
민용준 영화 저널리스트
Q<청설>은 개봉 당시 호평을 받았지만 최종 관객 수는 80만이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은 뒷심을 보이고 있지만 역시 80만 언저리다. <그 시절>은 아직 알 수 없다. 대만 청춘로맨스의 리메이크에 대한 관객 반응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한국영화 산업에 기여하는 측면도 있을까?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요즘처럼 한국영화가 어려운 시대에 젊은 배우들을 기용해서, 여러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80만을 한다는 것 자체가 유의미한 스코어다. 범죄와 사기와 사회문제에 연루되지 않은 10대, 20대 얘기가 얼마나 소중한가에 대한 관객 반응 같기도 하고. 취업난에 허덕이지 않는, 20대 본연의 이야기를 만나고 싶은 한국영화를 향한 바람이 나타난 것 같은 스코어다. N포 세대라고 하잖나. 연애나 취업 모든 걸 다 포기하는 세대들의 청춘이 항상 무력한 대상으로만 비치는 여지가 많은 시대다. 청춘은 그런 것만이 아니라 가장 순수하고 바보같이 사랑에 뛰어들 수도 있는 시절이라는 것, 멜로영화는 그것을 각성시켜주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 편의 대만 청춘로맨스 리메이크는 그것에 화답한 면들이 있다. OTT는 자극적이 되어 가는데, 순정에 화답한 시대라는 게 흥미롭다.
세 편의 리메이크 가운데 두 편, <말할 수 없는 비밀>과 <그 시절>이 여성 감독의 연출작이다. 과거엔 영화 전공자 가운데 여학생들이 그렇게 많은데, 현장에는 왜 여성이 이렇게 없느냐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요즘은 여성 스태프, 감독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독립영화계보다 상업영화계에 진입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여전히 많다. 이런 영화로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조금씩 자기 목소리도 낼 수 있지 않을까? 다만 대만 청춘로맨스의 리메이크들이 관성에 의해 개봉하고 있다는 생각은 든다. 예전에는 청춘로맨스물이 중박 정도면 괜찮다고 느꼈는데, 지금은 시장에 여유가 없으니 손익분기점을 못 넘으면 한시적인 생명으로 끝날 수도 있다. 그래도 이런 중급 규모 영화들이 활발하게 만들어진다면 한국영화가 살아날 여지가 있을 것이다.
민용준 영화 저널리스트
Q대만 청춘로맨스의 리메이크, 결국 YES인가, NO인가?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51% YES다.
청춘로맨스의 물꼬를 터주는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젊은 배우들이 주연급으로 가는 발판을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고. 실제로 <청설>의 홍경이나 <그 시절>의 진영이 얼마나 감성적이고 섬세한 연기를 할 수 있는지 목격하게 했다. 좋은 배우를 발굴하기 가장 좋은 장르라는 점에서 YES이지만, 한편으로 좋은 IP를 개발하려는 일종의 개척 정신을 완전히 꺾는 시도인 건 아닌가 싶다. 이런 리메이크들이 성공한다면 제작의 기준이 가성비, 안정성으로만 향할 것 같은 불안함이 있다.
어쩔 수 없이 YES다.
단점보다 장점이 더 눈에 들어온다. 요즘 한국 상업영화들이 너무 센 캐릭터 아니면 나사가 살짝 풀린 극화된 캐릭터를 내세운다. 청춘로맨스는 자연스러운 연기를 많이 보여줄 수 있는 장르, 배우가 연기 훈련을 하기에 적합한 장르다. 감독들도 연출 경험을 쌓는 발판이 될 수 있고. 동시에 산업적으로도 중소 규모 영화들을 꾸준히 만들어야 하니, 이런 영화들이 차지할 수 있는 몫이 있지 않을까? 10편 중에 특별한 한 편만 나오더라도 성공이다. 큰 틀에서 반대할 이유가 없다.
민용준 영화 저널리스트